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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이슈

꼬꼬무 시즌3 120회 익산 이리역 폭발 사고 -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by 한량선생 2025.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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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밤. 전라북도 이리시(현재의 익산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평범한 도시의 밤은 한순간에 굉음과 함께 붉은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꼬꼬무 시즌3 120회에서 다룬 '이리역 폭발 사고'는 단순한 사고를 넘어,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4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날의 참상을 되돌아보며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1. 이리역, 화약고가 되다

사고의 발단은 한국화약(現 한화)에서 군에 납품하기 위해 싣고 온 다이너마이트를 포함한 약 200톤의 화약류였습니다. 인천에서 출발한 화물열차는 11월 11일 오후 2시 30분경 이리역에 도착했고, 다음 날 아침 7시에 군부대로 옮겨질 예정이었죠.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리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화약고로 변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허술한 안전 관리였습니다. 화약 호송 책임자였던 신무일은 술에 취해 화약 열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추위를 느껴 켜 놓은 촛불이 화약에 옮겨붙어 끔찍한 폭발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화약류를 빼돌려 판매한 전력이 있었고, 당시에도 빼돌린 화약을 처리하려다 실패하자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는 의혹은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2. 잿더미가 된 도시, 아비규환의 현장

밤 9시 15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이리역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은 거의 파괴되었고, 8km 이내 지역까지 피해를 입을 정도였습니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는 59명, 부상자는 1,400여 명에 달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사망자가 100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1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도시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당시 이리역 주변은 인구 밀집 지역이었고, 특히 폭발 지점 근처에는 삼남극장이라는 큰 극장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폭발 당시 삼남극장에서는 가수 하춘화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많은 관객들이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꼬꼬무에서는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극장,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그리고 절규와 비명. 상상조차 하기 힘든 끔찍한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하춘화 역시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3. 맨발의 남자,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

꼬꼬무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맨발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폭발로 인해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쳐나온 사람들은 맨발로 잔해를 헤치며 가족과 이웃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고 직후, 정부는 이리시에 재난사태를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하여 구조 및 복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구호 물품과 의료진이 이리시로 보내졌고,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주일과 같은 유명 코미디언들도 이리역 폭발 사고 피해자들을 위문하기 위해 방문하여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도움의 손길들은 절망에 빠진 이재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4. 교훈과 책임, 그리고 기억

이리역 폭발 사고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큰 참사를 불러올 수 있는지, 그리고 사고 발생 시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고 이후, 화약류 등 위험물 관리에 대한 법규가 강화되었고, 안전 교육이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크고 작은 안전 사고들을 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리역 폭발 사고를 잊지 않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고 원인 제공자인 신무일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부주의한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당시 화약류 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안전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등 사회 전체의 책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리역은 사고 이후 복구되어 다시 문을 열었지만, 사고의 상흔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이리시는 익산시로 통합되었고, 이리역은 익산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사고 현장 인근에는 이리역 폭발 사고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5. 꼬꼬무를 통해 다시 보는 이리역 폭발 사고

꼬꼬무 시즌3 120회는 이리역 폭발 사고를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고,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영상 자료 등을 통해 사고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사고의 교훈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특히, '맨발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사고의 혼란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더욱 극대화하여 보여주었습니다.

꼬꼬무를 통해 이리역 폭발 사고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안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익산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데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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